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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 잊힌 길 위에 남겨진 도시의 결 –
오늘은 도시 속 방치된 계단 탐방기에 대해 이야기 해볼께요
사람들이 떠난 계단,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도시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오래된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구조물이 들어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 '애매하게' 남겨지는 경우가 있다.
낡은 계단이 바로 그렇다.
한때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길이었지만, 새로운 도로가 생기고 아파트 단지가 재배치되면서 이 계단들은 경계와 틈의 영역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누가 쓰는지도 모를 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는 통로가 되었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도시 속에 존재한다.
2025년 봄, 나는 그런 계단들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전국을 도는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사는 동네, 부산의 범일동, 남구 대연동, 연제구 연산동 일대를 돌아보며, 눈에 띄는 계단들을 찾아다녔다.
놀랍게도 불과 몇 백 미터 간격 안에 적지 않은 ‘버려진’ 계단들이 있었다.
비탈진 언덕길, 옛 아파트 담벼락, 폐쇄된 도로 옆.
그곳엔 낡은 콘크리트가 이끼를 머금고, 잡초와 바람만이 오갈 뿐이었다.
계단의 흔적을 따라 걷다: 탐방 사례 세 곳
▍범일동 철길 뒤편 계단
철길과 공장지대 사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묘하게 휘어진 계단이 하나 나온다.
양 옆으로는 주택이 철거된 흔적만 남아 있고, 한쪽에는 계단 일부가 붕괴돼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쪽에는 누군가가 꽃을 심어 놓았고, 그 근처에는 고양이 먹이 그릇도 놓여 있다.
이 계단은 한때 범일시장과 위쪽 고지대 주거지를 잇는 생활 통로였다고 한다.
이제는 상업구역 확장으로 대부분의 주민이 이주했지만, 몇몇 어르신은 여전히 이 계단을 이용해 내려온다고 한다.
"여기 없으면 돌아가야 하거든요. 무릎이 아파도 여기가 더 빠르니께," 라며 웃는 주민의 말이 인상 깊었다.
▍대연동 공원 뒤편 이중 계단
대연근린공원 뒷길로 접어들면, 마치 옛 산책로의 일부 같지만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이중 계단 구조가 눈에 띈다.
아래쪽은 넓은 콘크리트 계단, 위쪽은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이 썩어 있다.
이 구조물은 1990년대 후반, 주민 운동시설이 한창 조성되던 시절 설치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나은 접근로가 생기면서 공식 산책로에서 제외되었고, 지도에서도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지금, 낙엽이 쌓인 채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공간이 되었다.
▍연산동 주택가 골목 안 ‘집 사이 계단’
마지막으로 찾아간 계단은 연산동의 구 주택가 골목, 4층짜리 오래된 연립주택 사이에 위치한 계단이다.
너무 좁고 가파라 도저히 공공계단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현지 주민 말로는 "예전에 아이들이 지름길 삼아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유지와 공공구간이 모호하게 뒤섞인 구조로 관리도 되지 않고 있다.
계단은 낡았고, 중간에는 이웃 주민이 나무를 엮어 만든 작은 화단도 있다.
무단침입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그냥 보기 좋으라고”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공간은 법적으로 ‘애매한’ 곳이지만, 실은 가장 인간적인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잊혀진 계단의 의미: 기록할 가치가 있다
도시의 발전 속에서 낡은 계단은 쓸모를 잃어간다.
그러나 그 '쓸모 없음'이 반드시 존재의 무의미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계단들은 도시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무엇이 지워지고, 누가 남았는지를 보여주는 실마리다.
특히 고령화가 진행 중인 한국 사회에서, 언덕 위 주거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엘리베이터 없는 구형 아파트,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가구에게는 이 낡은 계단 하나가 생존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어린 시절 그 계단에서 놀던 기억을 가진 세대에게는 감정의 스위치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면서 느꼈다.
이 계단들을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동네의 결을 지키는 조용한 문서화 작업이라는 것을.
마무리하며
도시 속 방치된 계단은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조차 도시와 함께 살아간다.
그곳은 더 이상 주요한 통로도, 지도에 표시되는 경로도 아니다.
하지만 그 계단을 밟고 오르내렸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계단을 찍는 일은, 결국 도시를 걷는 일이었다.
잊힌 길 위에 발을 디딜 때, 우리는 그 도시의 또 다른 층위를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