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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 사라진 웃음소리, 그 자리엔 바람만 분다 –
오늘은 버려진 유원지의 지금에 대해 이야기를 해봅니다.
사람 사라진 공간, 그곳엔 기억이 남았다
1980~1990년대는 국내 유원지의 전성기였다. 가족 나들이의 필수 코스였고, 학교 소풍의 단골 목적지였다. 서울의 ‘드림랜드’, 대전의 ‘우암랜드’, 전주의 ‘완산랜드’, 부산의 ‘용당유원지’ 등 지역마다 하나쯤은 존재하던 테마파크들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유원지들이 쇠퇴한 이유는 다양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위축된 가계 소비, 도시 개발로 인한 부지 축소, 그리고 테마파크의 진화와 경쟁 심화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롯데월드, 에버랜드, 서울랜드처럼 자본과 규모를 앞세운 대형 놀이공원들이 고객을 흡수하면서, 지역 기반의 소규모 유원지들은 생존 자체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폐허가 된 채 남아 있는 그 흔적들 속에는 당대의 분위기와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붕괴된 회전목마, 덩굴이 뒤덮은 매표소, 칠이 벗겨진 미끄럼틀은 더 이상 웃음소리를 담고 있진 않지만, 그 공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뚜렷한 향수를 남긴다.
폐허 속 기록: 유원지의 마지막 얼굴을 따라가다
2025년 5월, 기자는 전북 전주의 ‘완산랜드’ 폐허지를 찾았다. 입구는 이미 아파트 공사장 펜스에 가려 있었고, 예전 매표소가 있던 자리엔 공사 자재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뒷편 언덕을 조금 올라가니 삐걱거리는 철제 구조물과 희미하게 남은 분수대 터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이곳엔 1993년까지 실제로 운영되던 회전목마의 철골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말 인형은 사라졌고, 천장에는 나무 덩굴이 엉켜 있었다. 입장객이 지나던 돌계단에는 이름 모를 들풀이 자라났고, 그 위로 산책하듯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SNS에서도 비슷한 폐유원지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폐유원지탐방 #잊힌놀이공원 등에는 이미 드림랜드(서울), 강변랜드(춘천), 우암랜드(대전) 등의 모습이 공유되고 있다.
이러한 사진들은 ‘호러 감성’으로 소비되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는 시간이 멈춘 장소에서 느끼는 정서적 연결이다.
또한 네이버 카페나 유튜브를 통해 유원지의 전성기 시절 브로슈어나 CF 영상을 모으는 활동도 계속되고 있다. 한 유튜버는 "부모님과 갔던 곳이 지금은 폐허라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지만,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폐허와 재생 사이, 그 경계에 선 유원지들
사라진 유원지는 반드시 버려져야만 하는 걸까?
최근 몇몇 지역에서는 이러한 폐유원지를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 은평구의 구 드림랜드 부지는 현재 ‘북한산 꿈의 숲’으로 개발 중이다. 놀이기구는 사라졌지만 산책로, 문화전시관, 작은 야외 공연장이 들어섰다. 과거의 놀이 공간을 현대적인 휴식처로 바꾼 사례다.
부산의 금강공원 유원지 또한 일부 놀이시설을 철거하고 시민공원으로 재단장했으며, 용당유원지 인근은 자연 친화형 산책로로 재정비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유원지에 남아 있는 집단 기억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도시 재생의 한 축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여전히 방치된 채 위험 요소로 남아 있는 유원지들도 많다. 울타리 없이 방치된 놀이기구나 낡은 구조물은 청소년들의 위험한 모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지자체가 이들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단순 철거가 아닌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폐유원지는 지역의 문화자산으로 충분히 거듭날 수 있다.
마치며
폐허가 된 유원지는 단순히 낡은 구조물이 아니다.
그 속엔 웃고 떠들던 가족의 모습, 첫 데이트의 설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녹아 있다.
2025년을 살아가는 지금, 사라진 유원지의 현재를 기록하는 일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조용한 작업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곳에서 ‘사라진 공간이 아니라, 잊히지 않은 기억’을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