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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사라지는 공간, 남겨진 시간
오늘은 공중전화 부스의 이야기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멈춘 시간 속의 전화기
도시를 걷다가 낯익은 yet 낯선 구조물을 발견했다. 길 모퉁이, 버스정류장 옆, 구청 뒤편, 학교 담장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공중전화 부스. 언젠가부터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그 앞을 무심히 지나친다.
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유리문엔 먼지가 앉았고, 버튼은 퇴색되어 있었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여전히 “삐-” 하는 신호음이 났다. 아직 살아 있다.
한때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말, 울며 걸었던 전화, 첫 고백의 떨림…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오갔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붙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부스는 도시의 한 시대를 대표한다.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공중전화는 누군가에겐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고, 누군가에겐 위기 속의 탈출구였다. 그 시절의 익숙한 ‘띠띠띠’ 소리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스들은 여전히 말을 건다.
"여기, 나는 아직 있어."
부스가 지키던 풍경, 변한 거리
사진기를 들고 도시를 돌며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다녔다. 몇몇은 아예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일부는 철거 직전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부산 남포동 거리 초입의 한 부스는 관광객들 사이에 묻혀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낡은 상자였지만, 그 주변은 바뀌었다. 골목마다 카페가 들어섰고, 건물 외벽은 벽화로 덧칠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부스만큼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시간을 버티는 벽처럼 서 있었다. 주변은 젊음과 소비가 뒤엉킨 빠른 변화의 중심지였지만, 그곳에서만은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또 다른 부스는 초등학교 담벼락 옆에 있었다.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와 부모들의 차가 서 있는 풍경 사이에 조용히 서 있었다. 철제 구조물엔 녹이 슬어 있었고, 안에는 누군가 메모지로 남긴 낙서가 붙어 있었다.
"엄마, 오늘도 기다릴게."
짧은 문장이었지만 가슴을 치는 울림이 있었다. 부스는 단지 통신 장비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이 남겨진 공간이었다.
이렇듯 공중전화 부스는 단순한 시설이 아니다. 도시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공중전화는 그 변화의 속도에서 멈춰 선 시간의 표지판이다. 그것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도시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사람들의 삶이 있었는지를 되짚어볼 수 있다.
철거되지 않은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
지금도 여전히 전국에 약 2만 개의 공중전화 부스가 남아 있다고 한다. 대부분은 사용량이 거의 없고, 관리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하나하나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싶었다. 사진으로 남기고,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그 주변의 공기를 글로 남긴다. 단순한 추억팔이나 복고 감성의 소비가 아니다.
이 기록은 도시의 감정 지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공중전화가 도시의 '쓸모없는 흔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사라져가는 존재의 마지막 존엄'이라 부르고 싶다. 오래된 공중전화 부스는 우리가 얼마나 급격히 디지털화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감정의 밀도를 되새기게 한다.
때때로 나는 아이들과 함께 부스를 찾기도 한다. 그들에게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게 해주고, "여기서 아빠는 예전에 엄마한테 몰래 전화했었어"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들은 신기해하면서도 곧 익숙한 스마트폰 화면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좋다. 그 짧은 체험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소'가 있었다는 기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공중전화 부스는 언젠가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기록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작고 조용한 공간 하나가 한 도시의 기억과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 감동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다.
오늘도 도시 어딘가에 남아 있을 그 부스를 찾기 위해, 천천히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