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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 개발과 방치의 사이, 고양이와 기억이 머무는 공간 –
오늘은 사람은 떠나고 고양이가 산다에 대해 이야기 해볼께요.
도심 한복판, ‘잊힌 집’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
도시 재개발은 속도전을 방불케 한다.
건설 울타리 안에서 삽이 움직이는 순간, 사람과 기억은 모두 철거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 속도에서 비껴나, 애매하게 남겨진 집들이 있다.
2025년 현재,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부산 서구 동대신동, 대구 남구 봉덕동 등에는
‘계획은 있으나 실행은 미뤄진’ 지역의 폐가들이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의 주거지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공간도 아니다.
현장을 걷다 보면 독특한 광경이 펼쳐진다.
문이 반쯤 열린 대문 너머로 고양이 한 마리가 슬쩍 고개를 내밀고,
붕괴된 지붕 아래로는 고사리와 풀들이 자생하고 있다.
낡은 현관 옆에 놓인 플라스틱 그릇에는 고양이 사료가 담겨 있고,
그 옆에는 "밥은 주되, 쓰레기는 버리지 마세요"라는 손글씨가 붙어 있다.
이런 공간은 법적으로 ‘철거 대상’이지만, 실제론 고양이의 안식처이자
주변 주민과의 묘한 공존 상태에 놓여 있다.
잊힌 집, 남겨진 것들: 시간의 흔적을 읽다
폐가는 흔히 ‘무너진 집’이라 생각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가 살았던 기록, 삶의 궤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부산 동대신동의 한 폐가 안.
창문은 깨졌고 벽지는 들떴지만, 벽면 한쪽에는 아이의 키를 재어둔 연필 자국이 남아 있다.
“2011.5.17 지우 121cm”라는 글씨 옆엔, 아직도 자국이 선명하다.
다른 한 집에서는 오래된 잡지, 형광펜 자국이 남은 교과서,
돌봄이 끊긴 화분이 반쯤 말라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말해준다 — 누군가 이곳에서 생활했고,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떠나야 했음을.
한 주민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 살던 분은 할머니 혼자였어요. 재개발 보상 문제로 떠나지 못하다 결국 요양원 가셨어요. 집은 그대로 남았고, 고양이들이 그때부터 살기 시작했죠.”
그 말처럼, 도시의 폐가는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떠난 이들의 사연과 남겨진 것들의 조용한 저항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고양이와 인간이 만든 공동의 풍경
이 폐가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 고양이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폐가 골목은 이제 ‘야옹이 골목’으로 불린다.
그 골목엔 10마리 넘는 길고양이들이 서식하며, 주민 자치로 관리되는 급식소도 운영 중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유기묘 증가가 아니다.
사람과 고양이 사이의 묘한 공생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고양이에게 밥을 주면서도, 마을 환경이 더 나빠지지 않게 조심스레 관리한다.
폐가는 더 이상 무단침입의 공간이 아니라, 마치 작은 생태보호지처럼 기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장소들은 예기치 않게 예술가나 사진작가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벽에 남은 흔적, 스러져가는 구조물, 고양이의 자연스러운 포즈는
도시의 정형화된 이미지와는 다른, 낡고 조용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물론, 현실은 복잡하다.
폐가는 법적으로 안전 문제를 동반하고, 불법 점유나 화재 위험도 따른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철거가 아닌, 기록과 재해석, 일시적 공존의 가치도 충분히 고민해볼 수 있다.
마무리하며: 사라진 공간에 남은 이야기들
도시의 폐가는 단순한 ‘빈집’이 아니다.
그 안엔 누군가의 시간과 감정, 그리고 지금 누군가의 삶이 흐르고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고양이는 살고 있고
사람의 기억은 떠났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무너진 벽에 붙어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무너진 담벼락 너머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고양이의 눈빛이었다.
경계와 호기심,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마치 묻는 듯했다.
"당신은 여길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도시는 끊임없이 변한다.
하지만 그 변화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때때로 멈춰 있는 것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라지지 않은 감정의 퇴적층을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